에세이가 있는 곳

은행나무 밑에서

랍비의 숲 The Forest of Rabbi 2022. 9. 23. 20:54
300x250

은행나무 열매가 많이 떨어져 있다. 가락시장역 근처에 있는 가로수만 보더라도 은행알들이 바닥에 누렇고 으깨어져있다. 나는 지금 내 두 손에 은행 냄새를 맡고 있다. 씻었는데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빌로볼과 은행산이라는 겉껍질의 과육같은 성분 때문이라 하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역겹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누런 황금 열매를 가만히 맡다보면 , 어렸을 적 시골에서 식구들이 한데 모여 자던 때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꼬리꼬리, 꾸리꾸리한 냄새....내복 바람으로 이불 속에서 식구들이 겨울에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 먹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났던 냄새.... 위생과는 거리가 멀지만 뭔지 식구들의 공동체가 한 이불 속에서 이루어졌던 야릇한 냄새...그 이불을 동굴 삼아 킁킁거리며 맡았던 시절......
은행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라고 한다. 사과나 복숭아는 열매가 있고 그 안에 씨앗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은행은 과육을 먹지 못하니 씨앗이 맞기는 맞나 보다...그래도 열매라는 단어가 익숙한 이유는 뭘까...아마도 못먹는 과육도 열매는 열매일지도 모른다. 누가 열매는 무조건 먹는거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내가 모를 수도 있지만...아무튼 못 먹는 열매.....고약한 열매 속에 있는 이 씨앗을 나는 최근에 주었다. 정말 냄새가 났지만....이것이 소변에 문제가 있는 사람한테 좋다고 해서 주은 것이다. 폐라든지 천식, 기침같은 데 좋다고 하는데 많이 먹으면 또 안 좋다고 들었다. 성인은 5~10 알 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이 정확한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대충 많이 먹지는 않는다. 은행 몇 알을 전자렌지에 넣고 돌리면 탁, 탁 하고 튀는데 그 맛이 쫄깃 쫄깃한게 엄청 맛있다. 주울때는 쭈그리고 앉아서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도 염증이나 알레르기를 일으켜 가렵거나 발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피부가 부을 수도 있다고 하니 주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은행을 젓가락으로 주으니까, 마침 골재 트럭에서 내린 아저씨가 저 안 쪽에 많다며 친절하게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야말로 트럭과 지게차에 밝혀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냄새가 차 바뀌에 계속 날게 뻔했다. 지나가다 종이컵에 한 종지만 줍고 가려고 했는데 졸지에 그 분의 친절에 그만 더 많이 줍게 되었다. 주으면서 기존에 떨어진 것들은 더 물컹거리며 고약했고, 새로 떨어진 것은 약간 파란기운이 감돌면서 잘 벗겨지지도 않았다. 이제 이 은행들은 땅에 파묻혀서 죽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은행나무들은 자신의 씨앗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고약한 냄새를 스스로 만들어 영원을 준비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냄새난다고 똥냄새난다고 무시했지만 그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 자신을 하찮게 한 성인처럼......예수님도...스스로 낮추어...그 모든 고뇌와 굴욕과 무시에도...결국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상징이 되지 않았는가........부처님도 왕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셔 인간에게 깨우침을 주셨다. 누구도 똥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은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이 은행들도 똥이 되었다......
특히 시내의 거리수 아래에 있는 암컷 은행나무를 봐라...사람들은 똥냄새 난다고 욕한다.....짜증을 낸다...베어버리라고 민원을 넣는다....역겹다고 차 안에 은행 열매는 넣지도 말라고 한다. 은행 나무는 다 듣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제 자식들을 미워하는 인간들을....제 자식들이 미움을 받아도...언젠가는 흙 속에서 다시 자라.. 본인들이 베이거나 죽어도 또 다시 살아갈거라는...... 거들떠보지 않음은....미움은....멸시는.....스스로 낮춤은....똥이 됨은.....그 치욕을 삼키고....눈물을 삼켜서도 자신의 숭고한 가치를 이루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물커덩 거리며 손에서 으깨지며 삐져나오는 은행알들. 그것을 보다가 문득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푸르기 그지 없다....노랗게 물들려면 아직도 먼 것 같다. 오래 전 천년도 더 된 은행나무를 본 적이 있다. 용문산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이 은행나무에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통일신라 경순왕( 927∼935)때 더 이상 천년의 신라를 계승할 수 없었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나라를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경순왕의 큰 아들이 나라를 잃어 더 이상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왕도, 태자도 될 수 없음을 알고 금강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바로 그 분은 김일(金鎰)이고, 우리가 익히 들은 삼베 옷인 마의를 입고 경주를 떠났다는 '마의 태자'이다. 은행나무도 천년을 넘게 살았는데...신라가 싸우지도 않고 고려한테 넘길 때는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한 의상 대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꽂아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나무를 톱으로 자르려고 했는데 피가 나기도 했다는데, 실제로 보면 부은 것처럼 도끼자국에 진물이 난 것처럼 부푼 부분이 있다.
1907년 대한제국때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1907년에서 1910년 항일 근대 봉기인 '정미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일본군이 여기 용문사까지 들어와 불을 질렀는데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또한 나라에 일이 생기면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 하는데 이는 은행나무가, 나무 자체를 뛰어넘는 고귀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은행나무 모습을 한 신이 깃든 것은 아닌지..... 그래서인지 나는 그곳에 갈 때면 나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하게 된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은행이 여기 저기 떨어져 있다. 풀 숲에, 작은 나무 속에......그때 나는 보았다. 아주 어린 은행나무들을......20센티도 안 되는 어린 은행나무들이 바글 바글 솟구쳐있다. 떨어진대로 그대로 모여서 싹이 튼 모양이다.......은행에게는 독성이 있는 누런 부분인 육질 외종피가 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누런 물컹한 부분을 벗기면 그 안의 씨앗을 먹을 수 있는데 그 얇은 막에도 징코톡신이 다량있다고 한다....정말 철저하기도 하셔라.....보호하고 보호하고...정말 귀한 씨앗들을 위해...아낌없이 독을 발라놓았구나 .....자....그럼 정리해보자....겉에 누런 육질 외종피에는 빌로볼과 소량의 징코톡신, 그리고 단단한 껍질 안 피막에는 다량의 징코톡신이 열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심하면 발작까지 일으킬 정도니 조심해서 다루자....이렇게 써보니 .은행 씨앗의 소중함은 마치 부모의 마음과 진배 없구나...
그래서 은행 열매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똥밟았다고 짜증내는 걸 줄이든지, 다른 데서 해야겠다. 저기 은행나무 엄마가 필시 눈을 부릅뜨고 제 새끼 욕하는 것을 듣고 있을테니...... 식물이든 인간이든...소중한 것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요리 조리 머리를 써서 유전자를 바꾸어놓았보다. 그러니 괜히 은행을 주어서 미안하기는 하다......그러다가도 어쩌면 또 ......자연이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이유야 어떻든.........은행나무에게 고맙기 그지 없다......용문사의 은행나무도 은행이 아직도 열린다고 하는데.......지금쯤 떨어졌거나 계속 떨어지리라...그 분의 은행은 어떤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번 가을에 가실 분들은 어서 서두르시라.


반응형

'에세이가 있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매어두기  (0) 2022.09.26
백신과 지석영  (1) 2022.09.25
상수멸정  (0) 2022.09.22
친절한 화  (1) 2022.09.21
안개  (0) 2022.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