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연립 주택 화단이 버려져 꽃씨를 뿌렸지요
메리골드, 호박, 해바라기, 깨, 보리...
상추,치커리,수레국화, 토마토는 모종을 가져왔죠
여기저기 심으니 땅이 모자라네요
풀들을 뽑아야 하나
한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민들레는 노랗게 꽃을 피웠고
접시꽃은 오래된 전설처럼 버티고 있네요.
박태기나무는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옆으로 꽃마리가 무더기로 피어있네요.
풀!
이렇게 외치며 꽃마리를 뽑아야겠다고
팔을 뻗었습니다. 잘 안 뜯겨 머리채를 잡아 뜯는 순간,
나 풀 아니에요!
꽃마리가 소리를 지르네요. 바로 손을 뗐지요.
작은 꽃들이 하얗게 점점이 피어 있는
그것은 풀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네요
그래서 다음 날 다른 것을 뽑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화단을 내려다보다가
키작은 명아주들을 발견했습니다.
저것들을 뽑아야지 하는데 꽃마리에 데어서 그런가
선뜻 뽑지를 못했습니다.
들어와 명아주를 찾아보니 심장에 좋다네요
다음날에 물을 주다가 달개비가 많아
저것을 뽑아야지 했지만 포기했습니다.
화단은 이제 내 감정의 싸움터가 되었네요.
애써 먹으려고, 팔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보려고 심은 것이니,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
먼저 마음에 물을 주고, 화분에 물을 주었습니다.
풀들이 쑥쑥 자랐습니다.
풀은 풀이 아니라 그냥 생명이라고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이라며
외치네요!
풀이라고 하면 다른 꽃들도 다 풀이어야 하죠!
네, 풀들의 주장에 화단은 온통 풀과 꽃들로
하나가 됐습니다.
어느날 화단에 가니 누군가
풀을 뽑았네요.
심지어 씨앗부터 키운 살구나무도 꺾이고
박주가리 순도 잘라 허연 진이 나오네요
보리도 시퍼렇게 나왔는데 풀이라고
다 뽑왔나봐요
박태기 나무도 콩꼬두리를 맺었는데
굵은 가지들을 마구 부러뜨렸네요
누가 그랬을까요?
풀이 있어 가꾸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풀! 잡초!
너무나 가혹한 이름이네요
너무나 잔인한 이름이네요
뽑혀져야 하는 존재.
죽어야 하는 존재.
없어져야 하는 존재.
처참한 화단을 바라보니
식물들이 죽어나간 전쟁터같네요
풀들을 뽑아야
꽃들이 잘 산다고 하네요
그러나 그대가 말하는 꽃의 기준은 뭔가요?
풀들이 있어
내 화단은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내 화단은 오히려 철학적이었습니다.
내 화단은 오히려 아이들의 배움터였습니다
내 화단은 오히려 고양이들도 발을 들고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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